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한국사회의 태도

김연수
발행일 2023.11.08. 조회수 888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한국사회의 태도 

 

최성용(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세계 최초의 인권 조약은 무엇일까? 유엔이나 인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세계인권선언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하루 차이로, UN 총회가 가장 먼저 채택한 것은 제노사이드 협약이다. 제노사이드 협약은 제2차 대전 시기의 잔혹행위를 국제사회가 ‘절대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아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결의가 무색하게도 1945년 이후의 인류는 전쟁과 학살을 반복해왔다. 학자들은 1945년 이후 냉전 시기를 두고 그것을 ‘냉전Cold War’이라 일컫는 것은 매우 서구중심적인 관점이라고 비판했다. 이른바 제3세계의 경험으로 보자면 그 시기는 격렬한 ‘열전Hot War’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1945년 8월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과 학살의 역사는 제3세계 국가들이 겪을 열전의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누구보다 빠르게 식민지, 전쟁, 학살의 기억을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오늘날 서구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진 채 과거의 역사를 지금과는 무관한 옛날 얘기로만 받아들인다. 최근 몇 년 사이 극동아시아에서는 대만이나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은 상황이지만,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우리와 무관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오랜 식민주의적 지배를 받아왔지만, 한국사회는 식민지의 경험을 잊어버린 채 서구 미디어의 편향적인 보도와 중동 및 이슬람에 대한 스테레오타입화된 이데올로기적 편견으로만 팔레스타인을 바라본다.

물론 조금이라도 팔레스타인의 처지나 역사를 아는 이들은 하마스의 테러로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특히 보수 개신교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이슬람에 대한 혐오적 편견과 이스라엘을 성지를 수호하는 핍박받는 유대인처럼 여기며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대개는 현재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이 프레임에 비판적인 이들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실은 둘 모두 정확하지는 않은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채 자기 땅에 유폐된 채 ‘하늘만 뚫린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에 세워져 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이스라엘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건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다. 그렇다면 국가간의 교전을 뜻하는 ‘전쟁War’이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말일 수 있을까? 하마스조차 국가가 아니라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무장정파 혹은 정당일 뿐이다. 전쟁이라기에는 너무나 비대칭적인, 압도적인 강자와 약자 사이의 관계다.

 

 

 

수많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 현재 살해되고 다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이 박살나는 상황에서, 우선은 학살을 막아야 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자업자득’이라느니 ‘이슬람 박멸’ 따위를 외치는 비상식적인 사람들도 있고, 그들이야말로 1945년 이후 UN의 설립과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법 및 국제사회의 노력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대화 상대로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단 학살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현재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근본적 원인’을 해결해 갈 필요가 있다. 애초에 국제법상 불법적 상태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해 온 이스라엘의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하마스가 테러를 할 이유가 없다. 하마스의 탄생과 성장을 지원해 민족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파타’를 견제하려 했던 것 역시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었다.

학살을 막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의 중요성은 오늘날 더 이상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헤게모니 국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가 오늘날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고, 미국에 응전하는 여러 강대국들이 부상하고 있다. 이를 과거의 냉전 시대처럼 양대 진영의 대결로만 볼 수 없는데, 러시아와 중국이 하나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100년 전 세계 1차대전 직전의 상황,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과 제국 본토 바깥에서의 국지전이 일어나던 상황과 오히려 유사하다. 다만 미국은 EU 및 NATO 국가들을 한편으로 그리고 인도-태평양 전략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냉전 시대처럼 하나의 진영을 형성하려 하지만, 그것이 성공할지는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들 간의 또 다른 대리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으로 대만과 한반도가 꼽히고 있다.

100년 전 인류가 저지른 과오를 21세기에 다시 반복할 것인가? 과거 전쟁과 학살, 식민지배를 겪은 인류는 평화와 인권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만들어 가기를 희망했다. 그 희망이 완벽히 실현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오늘날엔 그조차도 급속히 후퇴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국제질서의 전환기에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다시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

2차 대전 이후 탄생한 평화학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을 다음과 같이 뒤집었다.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 전쟁은 반드시 사회구조적 지배와 증오의 심성을 남긴다. 전쟁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불씨를 남길 뿐이다. 평화를 통해, 앞으로의 평화를 써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학살을 옹호하는 논리와 과감하게 단절하고, 평화에 기반해 전쟁과 지배, 착취와 억압이 없는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그리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그마한 염원들이 모이는 것에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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