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1 -분쟁의 역사와 기원

김연수
발행일 2023-11-02 조회수 736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1 -분쟁의 역사와 기원

 

이선우(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사진출처 BBC코리아.2023.10.08.)

 

 

고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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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고대는 늘 숭배의 대상이거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중간이 없고 극단적인 평가를 계속 오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구약성서 또한 그러하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성서의 내용을 극단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대한 반감으로 구약성서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다.

구약성서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여 그 후손인 요셉 시절부터 이집트에 가서 살다가 노예가 되고 또 탈출을 하고 광야에서 떠돌다가 정착해서 살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고고학적인 근거는 없으므로 이를 덮어놓고 믿는 것도 문제겠으나, 고고학적인 근거가 없거나 희박하다고 해서 고대의 문헌을 조롱거리로 삼는 태도도 사실 썩 좋은 태도는 아니다. 어차피 고대에 대한 자료는 한정적이고 우리는 그 부족함 안에서 이 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신화는 일종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탈과 이집트에서의 탈출에 대해 지금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 학자는 아무도 없고, 이집트 문명과의 큰 충돌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도로 발전한 이집트 문명이 서아시아 땅,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때의 충격이 그만큼 강렬했다고 해석하는 게 옳을 것이다.

12사사가 다스리던 시대를 지나(사사기) 사울 왕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연맹 정치 시대를 지나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왕조가 있고, 이후에 이스라엘 왕조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왕국으로 분열된다. 일종의 남북국 시대인데 고고학적으로 실존이 확인되는 것은 이때부터다. 이후에 바빌론 제국이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해 ‘예후드’라는 이름으로 편입했고(예레미야, 에스겔), 그 다음은 페르시아 왕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그 다음에는 알렉산더 대왕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화가 이 지역을 오래 지배했는데 그 동안 이 지역은 코엘레 시리아라 불렸다.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후계자를 명확히 지목하지 않고 ‘가장 강한 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알렉산더 대왕의 영토는 셋으로 분열된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코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가 제국을 나눠가졌는데 이 중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린 것은 셀레우코스 제국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약화, 분열되자 유대인들도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그 대표가 하슈모나이 왕국이다. 마카베오 가문이 주도한 독립운동이라서 마카베오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시대의 기록인 <마카베오서>는 개신교에서는 성서에 포함을 시키지 않고, 가톨릭에서는 성서에 포함을 시킨다.

그 다음은 로마가 이곳을 점령한다. 이 때의 나라 이름을 헤로데 왕국, 왕을 헤롯 왕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이름만 왕이지 식민지의 현지인 총독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신약성서의 배경 -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승천 - 이 바로 이 시대다.

유대인들은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에게 통치받는 것을 매우 기분 나쁜 일로 받아들였고 크고 작은 독립 운동을 벌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유대인들은 마지막에 신이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믿었다. 예루살렘의 성소에 로마 군인들이 들어갔을 때 유대인들은 산이나 나무, 성벽에 올라가 이제 저들이 신의 벼락을 맞고 죽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로마 군인들이 성소 안의 유물을 싹싹 긁어서 여유롭게 나오자 유대인들은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며 통곡을 했다. 이 이후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원후 100년 정도까지 유대인들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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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가깝게는 유럽에서부터 멀게는 중국까지 진출해서 살았는데 송나라의 수도 개봉부에도 유대인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청나라 때에도 외모는 중국인의 외모가 되었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1907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개봉부 유대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유대인은 혈통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개념이기도 해서 유대교를 믿으면 유대인으로 친다. 이를 두고 유대인들이 특이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유라시아 중앙부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사고방식이다. 유라시아의 양 끝에 사는 동북아인들과 서유럽인들이 유독 고대부터 혈통을 강조해왔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유대인을 살던 지역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동부~중부 유럽에 걸쳐 살던 유대인을 아슈케나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갈)에 살던 유대인을 스파라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걸쳐 살던 유대인을 미즈라힘이라고 하는데, 전통과 예법이 거의 똑같기 때문에 스파라딤과 미즈라힘을 합쳐서 스파라딤이라고 퉁쳐서 부르기도 한다.

현대 유대인의 대부분은 아슈케나짐이다. 생물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아슈케나짐은 유대인 부계혈통에 동부, 중부 유럽에 살던 여러 민족의 모계가 합쳐져서 이어져오는 유대인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유명한 유대인들-알버트 아인슈타인, 프란츠 카프카,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등-이 아슈케나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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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 이후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탄압을 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이듯이 유대인은 고리대금업과 탐욕으로 상징되는 존재들이었지만 사실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가 강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중세 시대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가 근대로 넘어와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격의 혐오로 바뀌면서 1800년대 이후 동유럽, 중부 유럽 각지에서는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박해하는 여러 사회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헤프헤프 폭동(Hep-Hep-Krawalle)이라 부른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자유주의 열풍이 반격을 당하며 유럽 전역의 내셔널리즘과 권위주의가 고조되었는데 그 여파로 피해를 본 집단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인 것이다. 독일부터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지방 전역에서 이 헤프헤프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 중에는 국가나 공공기관이 주도한 것도 많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도 많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을 떠나 언제는 독일로, 또 언제는 헝가리로, 또 언제는 우크라이나로 계속 옮겨다니며 살게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 대해 어떤 평론가들은 마조히즘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카프카의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이유 모를 불안과 공포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카프카의 극성스럽고 변덕스러운 부친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헤프헤프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카프카가 어렸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두들겨맞거나 집이나 점포가 방화범죄를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대인 박해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프랑스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의 필체가 간첩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사건으로 프랑스 전체가 반으로 갈려 싸우게 되었는데,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도 자신들의 억압을 폭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895년 1월 13일자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앙리 메예(Henri Meyer)의 '반역자'. 1895년 1월 5일에 이루어진 드레퓌스의 해임식 현장을 그림.)

 

 

갈등의 기원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만의 정치적 결사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이 먼 옛날 살았다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우리만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유대민족주의를 시온주의, 시오니즘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Mt.Zion)에서 유래했는데 예루살렘의 상징 같은 것이다. 많은 경우 시나 노래에서 시온산은 핍박받는 이들이 돌아갈 곳을 상징한다. 1970~80년대를 풍미한 흑인 댄스 음악 그룹으로 우리에겐 <징기스칸>이나 <원웨이티켓>으로 유명한 보니엠(BoneyM)의 노래 중에 <바빌론 강(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복음성가로 불려온 시온산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노래다.

By the rivers of Babylon, 바빌론 강가에
there we sat down 우린 앉아 있었어
Yeah, we wept, 우린 울었어
when we remembered Zion 시온산을 떠올릴 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사회주의자 중에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라는 사람이 있었다. 모세 헤스의 사상을 노동시온주의라고 한다. 모세 헤스는 사회적 평등이 필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인 전제 위에서 사회주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 맑스나 맑시스트들은 그를 추상적이라고 비판했다.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도 헤스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그는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이 유럽인과 동화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유대인은 자신의 민족성을 부정함으로써 다른 민족의 경멸을 불러왔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인종과 민족간의 투쟁의 역사이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860). 모세 헤스는 유대교는 위대한 신앙 재흥운동을 통해 부활해야 하며 그 어떤 유럽 철학/사상의 결합, 영합은 있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를 시온주의의 시작이라고 평가한다.

시온주의는 드레퓌스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자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가 처음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외국에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1897년 제1차 시오니즘 회의를 열고 이 회의를 헤르츨이 주재했기 때문에 지금도 헤르츨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1917년, 밸푸어 선언이 나왔다.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영국의 유대인 대표인 월터 로스차일드(Walter Rothschild, 1868~1937)에게 보낸 짧은 편지로 사실은 선언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처음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공인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1917년 11월 2일
로츠차일드 경,
폐하의 정부를 대표하여 내각에 제출되고 승인된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선언을 전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폐하께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국민의 집을 설립하는 것을 지지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팔레스타인 내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약속이 있기 전인 1915~1916년,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 1862~1949)이 아랍의 지방 호족 중 한 명인 후세인 빈 알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오스만제국이 붕괴되어도 그 지역 영토들의 자치독립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영국은 유대인들과도 아랍인들과도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밸푸어 선언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팔레스타인 이주를 시작했다. 갑자기 유대인들이 밀고 들어와서 땅을 사들이고 선주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론 아랍인들까지 이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스리슬쩍 이 문제에 발을 빼면서 알아서들 하시라는 식으로 모르쇠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랍 땅에서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무력충돌까지 벌어졌을 때,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대혼란이 끝난 후, 미국과 서유럽 각국은 유대인들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게 된다. 1948년 5월 14일의 일이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2 - 이스라엘 수립 이후와 지금‘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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